
[유광식 隨想, 추억이야기] 그 옛날 버스안내양들의 ‘없으면 오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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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유광식 기자 작성일 25-10-02 16:01 댓글 0본문
사진) 유광식 기자
요즘 방영되고 있는 어느 종편 방송의 버스안내양을 소재로 한 드라마, ‘백번의 추억’이 인기다.
지금이야 요금도, 회수권도, 토큰도 없는 시절이지만 40-50여년 그 옛날에는 만원버스 ‘차장 아가씨’들이 ‘오라이’ 하던 모습이 익숙한 풍경이었다.
- 고향의 동생ㆍ오빠 뒷바라지를 위해 고생했던 이 땅의 딸들
당시 곤색바지, 머리에 핀으로 꽂은 빵떡모자 그리고 윗옷이나 바지에 돈 넣는 주머니가 여럿 있었고 버스 옆구리를 치면서 ‘오라이’ 하던 젊은 아가씨. 바로 버스차장들이었다.
그들은 술 취한 아저씨, 짓궂은 총각, 철없는 중고교생들의 온갖 장난을 다 받아 주었다.
운전수 아저씨 비위 맞춰가면서 악착같이 돈을 벌어 고향의 동생 오빠 뒷바라지를 위해 일했던 차장아가씨들..
어쩌면 그들의 고생과 노력이 지금의 대한민국을 만든 힘이었다고 해도 그리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추운 겨울 손을 호호 불며, 구멍 난 장갑을 끼고 버스 앞문 뒷문에 서 있는 그들을 보고 당시 우리들은 ‘차순이’라고 부르며 놀리기도 했었다.
특히 1980년 초 정류장 옆 조그만 부스에서 쭉 이어진 회수권 10장을 사면 어떤 아이들은 그것을 10장으로 잘라 사용하지 않고 11장, 12장으로 잘라 차장들에게 슬쩍 건네며 버스를 타기도 했다.
물론 걸리면 뒷머리 긁으며 도로 내리기도 했다.
그 때는 늦은 밤 종점에 도착하면 차주들과 운전사들은 차장들이 요금을 ‘삥땅’했을까 봐 몸수색을 하던 모든 것이 열악했던 시절이었다.
사실 돈으로 내던 것이 회수권이라는 제도로 바뀐 것도 차장들이 돈을 떼먹는다는 차주들의 로비에 의해서 생긴 것이라는 말도 있다.
어쨌든 이런 저런 어려움 속에서도 그들은 이 땅의 진정한 산업역군으로 큰 몫을 했었다.
- 그들의 하루 노동시간은 18시간, 잠자는 시간은 4~5시간
그렇다면 우리나라에서 버스차장이 여성으로 바뀐 것은 언제쯤일까(?)..
한참 오래된 얘기지만 1961년 초까지 버스 안내원은 남성의 직업이었다고 한다.
또 버스 차장을 남성에서 여성을 바꾸는 첫 시도는 1959년 2월에 시작된다.
이는 그해 2월24일 ‘조선일보’ 기사를 보면 알 수 있다.
“24일 교통부에서 알려진 바에 따르면, 오는 4월 초하루부터 서울 시내를 운행하는 600대 가까운 시내버스의 차장을 모조리 여차장으로 간다”는 내용이다.
이 신문은 그 이유로 “그동안 남자 차장들에 의하여 가끔 발생되는 눈에 거슬리는 폭력 행동을 없이 하기 위해서 였다”라고 했다.
그리고 실제로 1961년 6월17일 당시 박광옥 교통부 장관에 의해 여자 차장으로 바뀌게 되었다.
하지만 이런 여자 안내양제도도 큰 시련을 맞는다.
당시 버스 회사들이 안내양들에게 강요한 노동 여건이 너무 열악해 사회 여론이 급속도로 악화됐기 때문이다.
1962년 11월 6일 ‘조선일보’에는 이와 관련 서울 시내버스 26개 노선에 근무하는 안내양 213명을 대상으로 한 실태조사 결과가 실렸다.
버스 안내양 대부분은 18살 전후의 나이에 지금의 초등학교인 국민학교를 나온 뒤 할 일이 없어 버스 안내양이 됐다는 사연이다.
또 그들의 하루 노동시간은 18시간이며, 하루 잠자리에 드는 시간은 4~5시간, 식사시간은 1시간에 불과하다고 했다.
그래서 여론의 직격탄을 맞은 버스회사들은 버스 안내양을 다시 남성으로 바꾸자고 건의하기도 했다.
- 영화로도 제작된 차장들의 애환
이렇듯 당시 차장들의 이야기는 사회적 이슈가 되었고, 그래서 영화로도 제작이 되었는데 바로 “영자의 전성시대‘가 그 첫 번째 영화였다.
1973년 소설가 조선작씨가 발표한 ‘영자의 전성시대’는 부잣집 식모로 지내던 시골 처녀 영자가 주인집 아들에게 성폭행을 당한 뒤, 집을 뛰쳐나와 버스 안내양으로 일하다 한쪽 팔을 잃고 성매매 여성으로 전락하는 사연을 소개하고 있다.
이 소설은 2년 뒤 영화로 만들어져 관객 36만 명(1975년 2월11일 국도극장 개봉)을 불러 모으는 대박을 터뜨렸다.
특히 영화에서 영자가 만원 버스에서 굴러 떨어져 한쪽 팔을 잃은 뒤 받은 보상금 30만원을 고스란히 고향으로 부치는 장면은 여성의 희생을 당연하게 생각했던 당시 시대상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리고 두 번째 영화는 김수용 감독에 의해 만들어진 ‘도시로 간 처녀‘였다.
1981년 12월 중앙극장 개봉작으로 유지인, 금보라, 이영옥, 김만, 한지일(한소룡), 트위스트 김, 홍성민, 위키리(이한필, 특별출연)등이 출연했었다.
실제로 있었던 어느 버스회사 안내양의 자살을 모티브로 하여 만들어진 영화였다.
하지만 이 영화는 '관제노조'로 이루어진 버스 안내양들이 극장의 간판을 떼는 등 격렬한 항의로 개봉이 되자마자 강제로 막을 내리게 된 비운의 영화가 되었다.
그리고 부산 등 지방에서는 개봉도 못하고 사전 검열에서도 여러 부분이 훼손되어 버렸는데, 이 영화가 개봉될 당시에 많은 화제가 되었었다.
그리고 버스회사들의 강력한 항의로 그만 상영이 중지되고 말았다.
- 조금은 우울한 40여 년 전의 아련한 추억
“정말 힘들었어요. 특히 종점에 도착하면 이른바 ‘삥땅’이라도 했을까 봐 몸수색 하는 차장 중에서 가장 나이 많은 언니들, 그리고 그것을 지켜보는 회사 남자 직원과 운전기사들, 그리고 우리들을 사람 취급안 하는 승객들, 참으로 슬펐고 힘들었어요. 그러나 고향에 있는 부모님과 어린 동생들을 생각하면 힘들었어도 참았어요”..
지금이야 할머니가 되어 의정부에서 잘 생활하고 있는 당사자 조모씨(가명 65세)는 당시 이야기를 조금도 하기 싫다고 했다.
아무튼 지금 생각해 보면, 이런 분위기에서 나와 같은 또래였던 차장 아가씨들은 그 때 무엇을 느끼고 어떤 생각을 했을까(?).. .
온 가족이 함께하는 추석명절을 며칠 앞두고 조금은 우울한 옛날의 아련한 추억이다.